
Saint Clair Market Intelligence | February 2026
해외 IR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 있다. 완벽하게 준비된 한국 창업가가 유창한 영어로 발표를 마쳤는데, 심사위원석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 간극은 언어 능력이나 사업 모델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창업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한국 IR 문화와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데 있다. 유럽 투자자들이 무엇을 보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사업의 강점과 무관하게 첫 관문을 넘기 어렵다.
심사위원석에서 관찰한 것
Saint Clair는 수십 팀의 한국 IR 피칭을 관찰해 왔다. 기억에 남는 것은 발표 내용이 아니라 발표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왜 이 사업을 하는지 확신을 갖고 말하는 사람.
한국 창업가들의 발표는 구조적으로 정교하다. 서론-본론-결론이 명확하고, 시장 규모와 수익 모델이 도표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그런데 연속으로 듣다 보면 발표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테크, 뷰티, 바이오텍, 의학 소재든 — 형식이 동일하고, 창업가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없던 것이 아닌 이상, 사업 카테고리만으로는 차별화할 수 없다. 투자자의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같은 단어, 다른 기준
한국에서 진정성은 간절함, 성실함, 헌신의 형태로 표현된다.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신뢰를 얻는 방식이다. 완벽하게 외운 스크립트로 실수 없이 발표하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한국적 기준에서 이것은 실행 의지의 증거다.
서구 창업 생태계에서 진정성은 다른 층위의 질문이다. 이 창업가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실제로 믿는가. 투자자들이 창업가에게서 찾는 것은 열정의 크기가 아니라, 진짜 당신이 누구인가다.
이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해외 IR 세션에서 스크립트를 완벽하게 암기해 발표하던 한국인 창업가가 중간에 내용을 잊어버렸다. 몇 초간의 침묵 뒤, 그는 심사위원들에게 짧게 양해를 구하고 자기 말로, 자기 속도로 제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 역설적으로 그 발표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이 됐다. 심사위원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마지막 그 몇 분이었다. 암기한 내용이 사라진 자리에, 창업가가 처음으로 실제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창업가가 발표를 망쳤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유럽 심사위원단에게는, 처음으로 진정성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왜 이 사업이 당신이어야만 하는가
투자자들이 창업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이 사람이 왜 이 사업을 하는지, 한 문장으로 머릿속에 박혀야 한다.
그런데 한국 창업가들의 발표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패턴이 있다. 산업 전체의 문제가 얼마나 크고, 시장이 얼마나 넓은지를 먼저 설명하는 구조다. 시장 규모는 투자자에게 중요한 정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투자자가 이 창업가를 신뢰해야 할 이유가 생기지 않는다. 핵심 질문은 따로 있다. 세상에 이 문제가 존재해서가 아니라, 왜 하필 내가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이다.
사이먼 사이넥은 2009년 『Start with Why』에서, 위대한 리더는 ‘무엇을’이 아니라 ‘왜’로부터 소통한다고 했다. 이 개념은 서구 창업 생태계에 깊이 흡수되어, 이제 투자자들이 창업가를 평가하는 기본 전제로 작동한다. 한국 IR 구조는 대부분 그 반대 방향이다. What과 How는 정교하게 설명되지만, Why는 종종 생략된다. Why를 이해하는 투자자는 그 창업가의 회복 탄력성과 실행 의지, 장기 파트너십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 Why 없이 What만 남은 투자자는 덱(deck)을 받은 것뿐이다.
리서치 기반 스타트업이 많은 한국 생태계에서, 기술의 정교함은 충분히 설명되지만 창업가가 왜 이 문제를 풀어야 했는지는 종종 생략된다. 가족의 영향이든, 전공이든, 직접 겪은 일이든 — 삶에서 이 사업을 만난 창업가는 사업의 의미와 자신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그 경험을 드러내느냐 감추느냐가 투자자의 기억에 직접 영향을 준다. 신나서 말하는 사람은 들린다. 그 에너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전달된다.
브랜드와 창업가가 일치할 때
성공한 창업가들을 오래 관찰하다 보면 공통점이 있다. 사업의 브랜드와 창업가의 모습이 닮아있다. 연설무대에서나, 커피 한 잔 나누는 자리에서나, 이메일에서나 — 같은 사람이 쓴 것처럼 읽힌다. 삶의 궤적과 일에 대한 철학과 브랜드 스토리가 하나로 읽힌다.
이 일관성은 설계의 결과가 아니다. 수없이 반복된 말과 행동이 쌓여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다. 투자자는 슬라이드만 읽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떻게 서있는지, 예상치 못한 질문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평가의 일부다.
피칭 이후, 남은 것과 사라진 것
Q&A는 많은 투자자에게 실질적인 대화시간이다. 스크립트에서 벗어났을 때 말이 무너지는 창업가는, 사업이 아직 몸에 배지 않았다는 신호다. 반대로,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자기 방식으로 답하는 창업가, 즉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창업가 는 사업의 본질을 체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신호는 맥락 전반의 일관성이다. 복도에서의 짧은 대화, 후속 이메일의 어조, 스태프를 대하는 방식이 데이터로 쌓인다. 유럽 투자자들은 긴밀하게 연결된 생태계 안에서 이런 인상을 비공식적으로 공유한다. 피칭 한 번은 단독 사건이 아니며, 그것은 평판과 신뢰의 궤적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한국 스타트업의 기술적 강점은 글로벌 무대에서 종종 저평가된다. 문제는 진정성 있는 확신으로 읽히지 않는 기술은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장 규모는 기억하지만 창업가는 기억하지 못하는 투자자에게는, 다음 미팅을 잡을 이유가 없다.
이 간극의 비용은 거절이 아니다 —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다. 피칭은 들렸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글로벌 자본 시장에 진입하는 한국 창업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구식 발표 기술이 아니다. 지난 20년간 서구 투자자 문화가 내면화해 온 기대치를 인식하는 것이다. 창업가의 이야기와 회사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여야 한다는 것. 그 일치가 있는 곳에서는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가장 핵심 내용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슬라이드도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한다.
작성: Lara, 마켓 인텔리전스, Saint Clair Pte. Ltd.
출처: Simon Sinek, Start with Why: How Great Leaders Inspire Everyone to Take Action, Portfolio/Penguin, 2009. Saint Clair 크로스보더 참여 경험, 유럽-한국 코리도, 2016–2026.
면책 고지: 이 글은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투자 조언이나 사업 조언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모든 의사 결정은 독립적인 조사와 자격 있는 전문가와의 협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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