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장벽은 걷혔다, 이사회의 벽은 그대로다
6월 브뤼셀에서 서명된 한·EU 디지털무역협정으로 한국 기술기업이 유럽 시장에 들어가는 법적 장벽은 사라졌다. 그러나 유럽 기업 고객이 계약 상대를 고를 때 들여다보는 기준은 그대로다. 이제 관건은 한국 기업의 조직 내부에 있다.
사잇클레어 · 마켓 인텔리전스 | 2026년 7월
핵심 요약
2026년 6월 10일, 유럽연합(EU)과 대한민국이 브뤼셀에서 열린 제11차 정상회담에서 디지털무역협정(DTA)에 서명했다. 2011년부터 양국 관계를 규율해 온 자유무역협정(FTA)을 보완하는 협정으로, 국경 간 데이터 이동을 보장하고 소스코드의 강제 공개를 금지하며 전자계약과 전자서명에 완전한 법적 효력을 부여한다. 다만 발효까지는 유럽의회 비준이 남아 있다. 이로써 한국 기술기업이 유럽 시장에 들어가는 법적 절차는 1년 전보다 눈에 띄게 간단해졌다. 반면 유럽 기업 고객이 어떤 공급업체를 신뢰할지 가릴 때 실제로 따지는 거버넌스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협정이 없앤 세 가지 걸림돌
이번 협정에는 마로시 셰프초비치(Maroš Šefčovič) EU 무역·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서명했고, 같은 정상회담에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EU 집행위원장과 안토니우 코스타(António Costa) 유럽이사회 상임의장, 이재명 대통령이 함께 참석했다. 협상 자체는 2022년 양측이 출범시킨 디지털 파트너십을 토대로 이미 2025년 3월 타결됐고, 협정문은 현재 유럽의회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비준을 거치면 EU 이사회가 최종 체결 절차를 밟는다.
협정이 겨냥한 걸림돌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국경 간 데이터 이동을 원활하게 해 EU에서 사업하는 기업이 더 이상 역내 서버에 데이터를 두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둘째, 어느 쪽 정부도 시장 접근의 조건으로 소스코드를 요구할 수 없다. 셋째, 전자계약과 전자서명이 양국 모두에서 완전한 법적 효력을 갖는다.
이 가운데 마지막 항목이 특히 무게가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EU와 한국 간 서비스 교역의 3분의 1 이상이 이미 디지털 방식으로 이뤄졌고, 그 규모는 약 110억 유로에 달했다. 나아가 집행위원회는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60%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디지털 거래와 맞물려 있다고 본다.
이번 협정은 EU가 싱가포르에 이어 두 번째로 맺은 독립형 디지털무역협정이다. EU는 최근 인도네시아·인도와 타결한 더 폭넓은 경제협정에도 디지털 무역 규범을 반영했고, 2026년 중 타결을 목표로 하는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과의 협정에도 같은 규범을 담고 있다. 이 흐름은 결코 작지 않다. 당장 2025년 양국 상품 교역액만 봐도 약 1,242억 유로에 달했는데, 이는 2011년 FTA 발효 이후 해마다 평균 5.3%씩 늘어난 결과다. 그 덕에 한국은 이제 EU의 여덟 번째 상품 교역 상대국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동안 상품 교역이 중심이던 이 관계에 디지털 규범이 더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럽 기업이 계약 전에 확인하는 것
유럽 기업의 구매 조직은 오래전부터 공급업체 평가 절차를 ‘책임의 분산’을 축으로 짜 왔다. 그래서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이들이 확인하려는 것은 대체로 세 가지로 압축된다. 공급업체 안에서 데이터 사고의 책임을 누가 지는지, 사내에서 제기된 개인정보 우려가 조치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얼마나 빨리 전달되는지, 그리고 그 회사의 구조가 규제당국의 조사나 피해 고객의 문제 제기를 견뎌낼 만큼 탄탄한지다. 이는 모두 거버넌스에 관한 물음이며, 무역협정이 다룰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
디지털무역협정은 새로운 시장 접근 조항과 별개로, EU가 자체 소비자 보호·개인정보 보호 기준을 유지할 권리를 명시적으로 보장한다. 따라서 유럽 시장에 들어서는 한국 기업은 앞으로도 유럽연합 일반개인정보보호규정(GDPR)이 세운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GDPR은 한국 기업이든 아니든 유럽에서 사업하는 모든 공급업체에 이미 똑같이 적용되고 있어서다. 다만 낮아진 것은 시장 접근의 문턱일 뿐, 규제 준수 요건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다. 애초에 한국 기업의 시장 접근 여부와는 상관없는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키운 방식, 소프트웨어에선 통하지 않는다
한국 기술기업은 반도체·자동차·조선을 중심으로 수십 년간 수출 경쟁력을 쌓아 왔다. 모두 중앙집중형의 빠른 의사결정 구조가 실질적 강점이 되는 산업이다. 최고 경영진의 결정이 조직 최상부에서 신속하게 내려오고, 그 속도는 물리적 제품의 세계 시장 점유율로 곧장 이어졌다.
반면 소프트웨어 조달 과정에서 관찰되는 양상은 전혀 다르다. 한국 소프트웨어 공급업체를 평가하는 유럽 기업 고객은 조직 전반에 퍼진 거버넌스를 살핀다. 최고경영자를 거치지 않고도 개인정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팀이 있는지, 실질적 권한을 가진 개인정보보호책임자(DPO)를 두었는지, 한 사람의 내부 결재를 넘어 외부 감사까지 통과하는 문서를 갖췄는지를 따진다. 의사결정이 한곳에 집중된 회사라면 규제 준수 체크리스트는 며칠이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책임이 조직 곳곳에 나뉘어 있음을 입증하는 기록은 수년에 걸쳐 쌓아야 한다. 이 둘은 성격이 전혀 다른 작업이다.
이 차이를 잘 보여주는 유럽의 선례가 있다. 프랑크푸르트나 암스테르담에 기반을 둔 기업들도 바로 이런 내부 책임 구조를 거듭 입증한 끝에 시장의 신뢰를 서서히 얻었다. 그것도 그들의 진입을 제도로 뒷받침하는 무역협정이 나오기 훨씬 전의 일이다. 한국 기업도 이제 법적 접근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유럽 고객이 진짜로 따지는 ‘입증된 실적’은 협상으로 앞당길 수 없다. 어떤 지름길도 없이, 오직 시간으로만 쌓인다.
한국 기업에 남은 진짜 과제
디지털무역협정은 한국 기업에 지금껏 없던 유럽 시장 진입로를 열어줬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이사회가 내부 권한을 어떻게 재편해 유럽 고객이 표준으로 여기는 거버넌스 증거를 만들어낼지, 그 문제까지는 다루지 않는다. 그 과제는 오롯이 한국 기업의 몫으로 남는다.
앞으로 몇 년이 그 결과를 가른다. 110억 유로로 커지는 EU·한국 디지털 서비스 교역에서 얼마만큼이 실제로 한국 기업의 몫이 될지, 아니면 이미 더 두터운 거버넌스 실적을 갖춘 다른 공급업체로 넘어갈지가 이 기간에 판가름 난다. 정부의 몫이던 장애물은 이번 협정으로 사라졌고, 남은 것은 한국 기업이 스스로 풀어야 할 과제다. 브뤼셀에서 아무리 더 협상해도 풀리지 않는다. 이제 한국 기업의 이사회가 답할 차례다.
출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EU and Korea sign landmark digital trade agreement at Summit, 보도자료 IP/26/1317, 2026년 6월 10일: https://ec.europa.eu/commission/presscorner/detail/en/ip_26_1317
유럽대외관계청(EEAS), EU and the Republic of Korea sign landmark Digital Trade Agreement at Summit, 2026년 6월 11일 — 약 110억 유로 규모, 2023년 기준 서비스 교역의 3분의 1이 디지털 방식으로 전달, 전 세계 GDP의 60% 이상이 디지털 거래와 연결, 싱가포르에 이은 EU의 두 번째 독립형 DTA, 2022년 디지털 파트너십: https://www.eeas.europa.eu/delegations/south-korea/eu-and-republic-korea-sign-landmark-digital-trade-agreement-summit_en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통상총국(DG Trade), EU trade relations with South Korea — 2025년 양국 상품 교역액 1,242억 5,000만 유로, 2011~2025년 연평균 5.3% 성장, 한국은 EU의 8위 상품 교역 상대국, DTA 협상 2025년 3월 10일 타결: https://policy.trade.ec.europa.eu/eu-trade-relationships-country-and-region/countries-and-regions/south-korea_en
EU 이사회 / EEAS, Joint Statement following the 11th European Union – Republic of Korea Summit, 2026년 6월 10일: https://ec.europa.eu/commission/presscorner/detail/en/statement_26_1326
EU Expects to Finalize Trade Pacts With Philippines, Thailand, Malaysia in 2026, The Diplomat, 2025년 9월: https://thediplomat.com/2025/09/eu-expects-to-finalize-trade-pacts-with-philippines-thailand-malaysia-in-2026/
MLex, EU and South Korea sign digital trade agreement, 2026년 6월 10일: https://www.mlex.com/mlex/articles/2487928/eu-and-south-korea-sign-digital-trade-agre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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