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잇클레어 · 마켓 인텔리전스 | 2026년 5월
한국 재계 최고위 인사가 세 가지 차원에서 한국이 직면한 한계를 진단했다. 외신은 그중 약 3분의 1만 다뤘다. 기관 투자자라면 연설 전문을 읽어야 한다.
요약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4월 28일 국회에서 연설했다. 이튿날 아침 외신 헤드라인은 한 줄로 정리됐다. 그가 한일 경제 통합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요약이긴 했지만, 그가 한 말의 약 3분의 1만 담아낸 것이었다. 연설 전문을 읽으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한국이 직면한 세 가지 한계를 차례로 진단한 한 편의 분석이고, 그 밑바탕에는 한 줄기 논리가 깔려 있다. 국가 차원에서 한국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단독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연설 전문 읽기
이 연설의 무게를 가늠하려면 먼저 두 가지 배경부터 봐야 한다. 최 회장은 SK그룹 회장이다. 동시에 대한상공회의소(KCCI) 회장으로서 일본 게이단렌(経団連)과 정례 정책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별개로 사회적 가치 측정 연구를 11년째 이어오면서 자체 연구소와 검증된 방법론을 갖춰놓았다. 이 두 회장직에 11년 연구가 더해지면, 이 연설은 단순한 재계 인사의 즉흥 발언과는 결이 달라진다.
연설은 그의 표현을 빌리면 세 가지 문제를 차례로 짚는다. 첫째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다. 성장 모델이 둔화하는 가운데 여기에 십수 년에 걸친 AI 충격이 더해지고 있다. 둘째는 AI 인프라다. 향후 십 년이 요구하는 규모를 한국이 단독으로 동원하기는 어렵다. 셋째는 지정학이다. 중국 GDP의 10분의 1 수준에서 한국이 모든 규칙을 정할 수는 없다.
이 세 가지를 잇는 한 줄기 논리는 표면에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결국 최 회장이 매번 제안하는 것은 한 가지다. 국가보다 큰 단위의 틀을 만들자는 것이며, 그 위에 세 개의 벽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첫 번째 벽 — 측정의 문제
먼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진단이다. 한국 전후 발전을 떠받친 두 축, 즉 경제 성장과 민주화는 제 역할을 다했다. 다만 성장 축이 둔화 국면에 들어섰다. 자본 효율성은 떨어지고, 투자 수익률은 갈수록 박해지고 있다. 대기업 중심으로 짜여온 발전 모델은 AI 충격이 본격화되기 전에 새로 짜야 한다. 이 충격은 십 년 단위로 펼쳐지고, 재교육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노동 구조를 갈아엎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존 제도는 평상시의 구조 변화를 전제로 만들어져 있지만, AI가 일자리를 대체하는 속도는 이미 그 전제를 넘어섰다.
진단의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산출물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시스템은 화폐로 환산되는 산출만 집계한다. 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 기업이 회피한 환경 비용, 기업이 일군 복지 효과, 기업이 납부한 세금까지 — 모두 실재하는 산출이지만 시장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다. 정부는 화폐 산출에 매긴 세금을 거둬들여 그 다음 단계에서 복지로 돌려준다. 경제가 만들어내는 것과 경제가 측정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최 회장의 설명대로라면, 공공 정책이 AI 충격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다.
이 문제 의식은 2009년 스티글리츠–센–피투시 위원회(Stiglitz–Sen–Fitoussi Commission)의 ‘경제 성과 및 사회 진보 측정’ 보고서 이후 국제 학계에서 살아 있는 ‘GDP 너머(Beyond GDP)’ 논쟁과 곧바로 맞물린다. 다이앤 코일(Diane Coyle)의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2014)는 화폐 총량이 성과 측정 도구로서 갖는 한계를 짚었고, 마리아나 마추카토(Mariana Mazzucato)의 『The Value of Everything』(2018)은 누가 가치를 만들고 누가 가져가는가의 문제로 같은 비판을 확장했다. 최 회장은 같은 질문을 한국 산업의 규모 안에서 11년에 걸쳐 다뤄왔고, 자체 연구소와 검증된 방법론이 그 작업을 받친다. 이 부분은 결국 한국을 ‘GDP 너머’ 논쟁의 한국판 무대에 올리는 시도다. 만약 이를 최 회장 개인의 사적 프로젝트 정도로 읽는 서구 기관 투자자가 있다면, 그 무게를 잘못 읽은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정책의 형태는 두 시장을 함께 운용하는 방식이다. 한쪽 시장은 화폐로 가격이 매겨지고, 다른 한쪽은 사회적 가치로 가격이 매겨진다. 국가는 그 사이에서 심판자 역할을 맡는다. 결국 첫 번째 시장이 AI 대체로 줄어드는 만큼을, 두 번째 시장의 고용 흡수력이 일정 부분 메워준다는 구상이다.
사잇클레어는 최 회장이 설정한 조건 안에서 이 부분을 다룬다. 측정 논의 자체는 전문 문헌, 회의론, 기술적 난이도를 안고 있는 영역이다. 다만 이 연설의 핵심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AI가 본격 도래할 때, 한국 경제가 지금과는 다른 측정 체계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본 배분 관점에서 보면 결국 ‘시점’이 관건이다. 새 측정 체계는 한국 정책에 먼저 자리잡고, 국제 시장이 그 변화를 자산 가격에 반영하기까지는 시차가 따른다. 그 시차가 좁혀질 때, 한국 자산에 적용되어 온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같이 풀린다.
두 번째 벽 — 자본과 콘크리트
인프라 진단은 숫자로 표시된다. 최 회장은 AI 구축의 네 가지 병목을 짚는다. 자본, 전력, GPU, 메모리. 이 넷이 서로를 제약한다.
그가 인용하는 자본 숫자는 직설적이다. 1기가와트(GW)급 AI 데이터센터를 짓는 데 약 500억 달러가 든다. 한국 전체 데이터센터 용량은 약 1GW 수준이지만, 그중에서 진정한 AI 가용 용량은 5%에 못 미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향후 십 년의 AI 인프라에서 한국이 단순 사용자가 아니라 인프라 구축 주체로 참여하려면 10~30GW가 필요하며, 상한선으로 환산하면 5,000억 달러에서 1조5,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따라야 한다는 게 그의 추산이다.
전력은 일반적인 유틸리티 입력 요소에서 구조적 제약 요인으로 부상했다. 배치 모델도 그에 맞춰 바뀌었다. 최 회장의 전언에 따르면, 트럼프 미 대통령이 미국 빅테크에 내린 지시는 ‘전력은 알아서 만들어 쓰라’였다. 새로운 패턴은 AI 데이터센터를 전용 발전소와 같은 부지에 두고 중앙 전력망에서 분리하는 방식이다. 중앙망이 AI의 부하 변동을 효율적으로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누구보다 빠르게 발전 용량을 늘려왔고 그 격차를 계속 벌리고 있다. 미국은 첨단 칩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반면, 한국은 메모리 병목 위치에 놓인다.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공급할 수 있는 회사는 전 세계에서 단 세 곳, 그중 두 곳이 한국 기업이다.
GPU 위치는 유동적이다. 엔비디아의 우위는 여전하지만, 추론(inference) 시장이 분화하면서 특정 칩 아키텍처의 지배력은 약해지고 있다. 반면 메모리 위치는 더 좁고, 그 좁은 상태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 부분의 결론은 분명하다. AI 시대의 인프라 구축 주체로 한국이 참여하기 위한 자본 규모는 국가 동원만으로 채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구축에 필요한 그리드 논리 또한 국가 그리드 계획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메모리의 공급자 집중 또한 한 나라 전략만으로 위험을 분산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 셋이 모두, 최 회장의 독해로는, 5,100만 인구의 국가가 단독으로 넘기 어려운 벽이다. 향후 십 년의 자본 배분 질문은 결국 한 줄로 좁혀진다. 한국은 어떤 조건으로 글로벌 AI 인프라 경쟁에 들어가야 하며, 그 조건이 요구하는 파트너 규모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세 번째 벽 — 섬을 벗어나야 할 섬
세 번째 벽은 외신이 다룬 부분이다. 최 회장의 분석은 지리에서 출발한다. 한국은 반도에 자리한다. 대륙은 북한에 가로막혀 있고 남쪽 해안은 대양으로만 열려 있다. 한국 경제는 기능적으로 보면 섬 경제다. GDP는 대략 중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이 격차는 결국 한국이 자기 규모의 10분의 1 국가를 대하는 방식과 같은 구도다. 관계는 일방적이다.
그가 내놓는 제안은 한일 통합이다. 외부에서 두 경제를 사실상 단일 시장으로 받아들일 만큼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게 그 핵심이다. 합쳐진 GDP 6조 달러는 대략 중국의 3분의 1 규모다. 그 수준에 이르러야 한일 결합 경제는 미국과 중국이 더 이상 우회할 수 없는 구조가 된다. 그보다 작은 규모에서는 우회된다. 최 회장은 EU를 비유로 든다. 핵심은 EU가 27개 회원국으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작은 프랑스와 독일이었다. 27개국이 함께 결정하기에는 속도가 따라주지 않았고, 핵심 국가들이 먼저 묶여야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통합된 핵심에서 두 가지 확장이 따라붙는다. 남쪽 모델은 아세안 경제를 6조 달러 닻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그 주변에 아시아형 공동체가 형성되는 그림이다. 북쪽 모델은 중국 동북부 연안(산둥성, 장쑤성, 동북 3성)과 러시아 연해주가 블록의 경제 궤도에 들어오고, 그 결과 형성되는 경제적 압력이 결국 북한 개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둘 다 장기 시나리오다. 최 회장은 이 두 모델을 통합 이후 따라올 장기 부가 효과로 본다. 통합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연설과 이어진 질의에서 한일 통합을 위한 구체적 추진 항목 30개가 거론됐다. 그 가운데에는 일본과의 국경 간 송전망과 가스 연결망, 공동 인프라를 통한 양국 에너지 비용 동반 절감, KCCI와 일본상공회의소가 정례적으로 이어오고 있는 대화 등이 포함됐다. 도쿄 측은 이 제안에 공식 화답을 하지 않았다. 한국 정치권에는 어느 정부든 신중하게 다뤄야 할 역사적 사안이 함께 걸린다.
핵심은 결국 하나다. 이 진단은 실제 양국 간 합의보다 먼저 형성되고 있다. 바로 그 시차 때문에 이 연설은 시장이 주목해야 할 신호가 된다. 같은 무게의 진단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인사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 그것이 결국 양국 합의로 가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 배분 관점에서의 함의 역시 분명하다. 진단은 시간이 갈수록 더 쌓여가지만, 실제 합의는 그보다 한참 늦게 뒤따른다.
기관 투자자의 새 질문
세 개의 벽, 한 줄기 논리다. 어느 벽에서든 자본 배분 문제가 같이 걸리고, 어느 벽에서든 그 제약은 한 나라가 단독으로 풀어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이 연설을 무게 있는 시장 신호로 여기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발언자다. SK그룹과 KCCI 회장은 한국 재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자리이고, 그가 이번 메시지를 전한 자리는 국회였다. 둘째는 그가 같은 영역에서 보여온 일관된 행보다. 2월의 한·미·일 협력 추진, 그리고 11년에 걸쳐 이어온 사회적 가치 측정 연구가 그 행보다.
연설 전문을 읽은 기관 투자자라면 한국에서의 기회에 대한 질문 자체를 달리하게 된다. 측정 부분에서 던질 질문은 두 가지다. 새 측정 체계가 한국 정책에 언제 도입될 것인가, 그리고 국제 시장이 그 변화를 자산 가격에 반영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인가. 인프라 부분에서도 두 가지를 본다. 한국이 어느 정도 규모의 GW 단위 투자 약속을 들고 들어가는지, 그리고 그 약속의 파트너가 누구일지다. 통합 부분에서는 최 회장의 진단이 실제 양국 간 합의로 넘어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를지, 그리고 그 효과를 가장 먼저 흡수할 산업이 어디일지가 다음 질문이다.
투자 포지션을 잡기 전에, 한국 재계 최상위 인사들이 시장을 어떤 시각으로 읽고 있는지를 같은 깊이로 따라잡는 작업이 먼저다. 이 단계를 건너뛰면 기관 투자자는 외신 헤드라인 수준의 정보로 의사결정을 내리게 된다.
세 개의 벽 가운데 측정의 벽과 고립의 벽이 한국 자본 시장에 어떤 구체적 모습으로 자리잡는지는 이 시리즈의 다음 글 Ground Truth: Korea Corridor가 이어서 다룬다.
출처
1차 자료: 최태원 회장, 4월 28일 한·중 의원외교포럼 주최 국회 세미나 연설 전문 (사잇클레어 보유본).
SK chairman calls for deeper South Korea-Japan economic ties — UPI, 28 Apr 2026
KCCI chief suggests EU-style economic bloc between Korea, Japan — Korea Herald
SK chief doubles down on Korea-Japan economic bloc push — Korea Herald
Chey Tae-won urges Korea-Japan economic bloc — AJU Press, 28 Apr 2026
최태원 “AI 경쟁력 위해 일본과 협력해야”…한일 경제통합 제안 — 연합뉴스
최태원 회장 “한일 경제 통합으로 美·中에 맞서야” —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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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AI 패권 경쟁…일본과 경제 통합하고 아시아연합 주도해야” — 아시아투데이
Trilateral Cooperation Among Korea, the U.S., and Japan in the AI Era — Asia Business Daily, 22 Feb 2026
Korea faces mounting calls for economic coalition with Japan — Korea Times, 15 Aug 2025
Stiglitz, J., Sen, A., & Fitoussi, J.-P. (2009). Report by the Commission on the Measurement of Economic Performance and Social Progress.
Coyle, D. (2014).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Mazzucato, M. (2018). The Value of Everything: Making and Taking in the Global Economy. Allen Lane.
고지: 본 글은 정보 제공만을 목적으로 한다. 투자 자문에 해당하지 않는다. 모든 의사결정은 독자적 조사와 자격을 갖춘 자문가의 상담을 기반으로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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