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 Clair Global · 마켓 인텔리전스 | 2026년 8월
유럽 우선(Europe First) 시리즈 — 1/4
유럽이 자국의 경쟁력 문제를 이토록 솔직하게 기록한 문서는 드물다. 드라기 보고서 이야기다. 유럽에 진출하려는 기업의 눈으로 보면, 이 보고서는 유럽이 아직 스스로 메우지 못한 수요의 목록이다. 2008년부터 2021년까지 유럽에서 기업가치 10억 달러를 넘긴 기업 147곳이 태어났지만, 그중 40곳이 본사를 해외로, 대부분 미국으로 옮겼다. EU 기업의 60% 이상은 규제를 투자의 걸림돌로 꼽는다. 자본도 고객도 정책적 의지도 유럽엔 있다. 없는 것은 연구 성과를 사업으로, 그것도 큰 규모로 키워 내는 기업이다. 바로 이 빈틈이 한국 기업에게는 가장 큰 기회다.
유럽이 스스로 쓴 진단서
이 보고서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유럽 경제가 왜 미국과 중국에 뒤처졌는지 설명하기 위해 작성했다. 진단은 냉정하다. 세계 50대 기술기업 가운데 유럽 기업은 단 넷뿐이고, 유럽 기업이 연구·혁신에 쓰는 돈은 2021년 기준 미국 기업보다 2,700억 유로가량 적었다. 특히 상징적인 대목은 연구·개발(R&D)이다. 지난 20년간 유럽의 R&D 투자 상위권은 자동차 기업이 줄곧 주도해 왔다. 미국도 2000년대에는 자동차와 제약이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이후 소프트웨어·하드웨어를 거쳐 지금은 상위 3곳이 모두 디지털 기업으로 바뀌었다. 결국 유럽은 과거의 산업에 계속 돈을 댄 셈이다.
가장 뼈아픈 것은 인재 통계다. 2008~2021년 유럽에서 태어난 유니콘 147곳 중 40곳이 본사를 해외로, 대부분 미국으로 옮겼다. 자국 시장이 대주지 못한 자본과 성장 무대를 찾아 떠난 것이다. 유럽은 발명은 하되 키운 승자는 수출한다. 보고서가 이를 연구의 실패가 아니라 스케일업의 실패로 규정한 이유다. 과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그 과학을 기업으로 키우는 역량은 한참 뒤처져 있다.
규제도 부담을 키운다. EU 기업의 60% 이상이 규제를 투자의 장벽으로 여기고, 중소기업(SME)의 55%는 규제·행정 부담을 가장 큰 애로로 꼽는다. 규제 자체도 파편화돼 있어, 회원국 전역의 디지털 분야에 적용되는 기술 관련 법령만 100개에 이르고 규제 당국도 270곳을 넘는다. 유럽은 디지털 경제를 촘촘히 규율한 대신, 그 경제를 키우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었다.
빈틈이 가장 큰 곳은 생산성을 좌우하는 디지털·첨단기술 분야다. 미국이 클라우드와 반도체, AI를 키우는 사이, 유럽은 연구 프로그램에 돈을 댔고 그렇게 키운 기업이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유럽은 이미 1조 유로로 답하고 있다
물론 유럽이 문제를 인정한다고 실행까지 빠른 것은 아니다. 유럽정책혁신위원회(EPIC) 집계를 보면, 383개 권고 가운데 완전히 이행된 것은 15.7%에 그쳤고, 부분 이행까지 더해도 41.3%에 머문다. 특히 에너지와 디지털화 분야가 뒤처졌다.
그렇다고 유럽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드라기 보고서는 2024년 9월, EU 집행위원회가 직접 요청해 나온 문서다. 한 정부가 자국의 약점을 스스로 진단하게 하고 그 결과를 그대로 공개하는 일은 흔치 않다. 보고서가 나온 뒤 집행위는 ‘경쟁력 나침반(Competitiveness Compass)’을 통해,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드라기가 지목한 과제에 1조 유로가 넘는 자금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항목만 봐도 인공지능(AI)에 약 2,000억 유로(이 가운데 200억 유로는 ‘AI 기가팩토리’), 방위산업에 SAFE(Security Action for Europe) 프로그램으로 1,500억 유로, 탈탄소화에 ‘클린 인더스트리얼 딜’로 1,000억 유로 이상, 스타트업·스케일업에 ‘테크EU(TechEU)’로 700억 유로다.
네 항목은 성격이 저마다 다르다. AI 2,000억 유로와 클린 인더스트리얼 딜 1,000억 유로 이상은 민관 자금을 합쳐 끌어내겠다는 ‘동원 목표’다. SAFE 1,500억 유로는 산업계에 주는 보조금이 아니라 회원국을 위한 대출 한도이고, 테크EU 700억 유로는 유럽투자은행(EIB)이 2025~27년에 집행하는 금융 지원 규모다.
다만 이 돈이 격차를 곧바로 메우지는 못한다. 격차를 메우려는 노력에 자금을 댈 뿐이고, 그 속도는 유럽이 정한다. 아직 갖추지 못한 역량을 1조 유로를 들여 키우는 동안에도, 유럽은 그 역량을 밖에서 계속 사들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은 수요가 자국 공급을 앞선다.
한국 스타트업에는 기회다
한국 산업의 성격은 유럽의 약점을 정확히 뒤집어 놓은 모양이다. 유럽이 어려워하는 바로 그 지점, 곧 연구를 사업으로 연결하는 일에서 한국은 속도가 빠르다. 실험실에서 양산으로, 다시 세계 시장으로 넘어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유독 짧다. 우고 아스투토 주한 EU 대사도 지난 6월 서울에서 열린 넥스트라이즈(NextRise) 2026 포럼에서 같은 취지로 말했다. 유럽은 여러 연구 분야에서 앞서 있고, 한국은 그 연구를 산업 성과로 바꿔 규모를 키우는 데 특히 강하다는 것이다.
증거는 이미 나와 있다. 한 한국 의료 인공지능 기업은 2023년부터 스웨덴의 한 유방암 검진 센터에서 ‘독립 판독자’로 일하고 있다. 유럽 검진이 쓰는 이중 판독, 곧 두 명이 각 영상을 보는 방식에서 한 자리를 이 인공지능이 맡는다. 재검사를 부를지 여부의 최종 판단은 여전히 영상의학과 의사들의 합의 몫이다. 유럽이 진단은 해도 인력으로는 채우지 못한 의사 부족을 이렇게 현장에서 메우고 있는 셈이다. 이 사례는 이어지는 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같은 공식은 드라기 보고서가 지목한 다른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응용 AI, 반도체와 첨단 하드웨어, 청정기술, 그리고 유럽 기존 기업이 더디게 만들어 온 산업용 소프트웨어다. 어느 쪽이든 유럽의 수요는 뚜렷한데, 정작 유럽 내부의 공급은 부족하다.
물론 유럽이 쉬운 시장은 아니다. 규제는 외국 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회원국마다 규정이 달라 유럽을 하나의 시장으로 뭉뚱그린 기업은 고전한다. 그러나 그 높은 문턱은 일단 넘고 나면 경쟁자를 막아 주는 진입 장벽이 된다. 기준이 까다로울수록, 그것을 통과한 기업이 그 시장에서 더 오래 살아남는다.
어느 지역에 진출할지 고민하는 한국 창업자에게, 미국은 규모와 자본을 주지만 모든 빈틈을 이미 차지한 현지 경쟁자도 함께 안겨 준다. 반면 유럽은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를 스스로, 그것도 상세히 공개한 시장이다. 결국 유럽의 약점은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빈틈을 채울 역량을 가진 한국 기업에게, 유럽은 지금 가장 열려 있는 시장이다.
출처:
유럽 경쟁력에 관한 드라기 보고서 (유럽집행위원회): https://commission.europa.eu/topics/competitiveness/draghi-report_en
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 Part A (유럽집행위원회, PDF): https://commission.europa.eu/document/download/97e481fd-2dc3-412d-be4c-f152a8232961_en
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 Part B (유럽집행위원회, PDF): https://commission.europa.eu/document/download/ec1409c1-d4b4-4882-8bdd-3519f86bbb92_en
The Draghi report: one year on (유럽집행위원회): https://commission.europa.eu/topics/competitiveness/draghi-report/one-year-after_en
Draghi Observatory & Implementation Index, 2026년 7월 갱신 (유럽정책혁신위원회, EPIC): https://draghiwatch.eu/
InvestAI (IP/25/467, 유럽집행위원회): https://ec.europa.eu/commission/presscorner/detail/en/ip_25_467
SAFE (Security Action for Europe), Council of the European Union: https://www.consilium.europa.eu/en/policies/safe/
TechEU Platform (유럽투자은행, EIB): https://www.eib.org/en/press/all/2025-314-europe-s-innovative-companies-get-boost-as-eib-group-launches-techeu-platform-to-simplify-financing
EU and Korea seek scale-up partnership at NextRise 2026 (AJU Press): https://www.ajupress.com/view/20260618171516456
Lunit and Capio S:t Göran Hospital collaborate to address radiologist shortage, 2023년 6월: https://www.prnewswire.com/news-releases/lunit-and-capio-st-goran-hospital-collaborate-to-address-radiologist-shortage-with-ai-powered-mammography-analysis-3018420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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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Saint Clair: 세인트 클레어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국경 간 투자 회사다. 자본이 국경을 넘나드는 인프라까지 함께 구축하는 기관 투자자다. Saint Clair Global은 기업을 국제 기관 표준에 맞춰 구축한다. 사업이 구하는 자본 앞에서 성공적이고 매력적인 투자 기회로 읽히게 만드는, 그 실천의 기업 측면이다. 2016년 이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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