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int Clair · Market Intelligence | 2026년 5월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초기 단계 공공 펀딩 시스템을 갖춘 나라 중 하나다. 해마다 수조 원이 이 구조를 거쳐 가지만, 그 성과는 균일하지 않다. 정부 지원을 받은 기업 가운데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 비중이 높고, 2025년에는 펀딩을 받은 스타트업 수가 줄어든 대신 자본이 소수 기업에 몰렸다. 게다가 스타트업 종사자의 직무 만족도 역시 관련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았다. 원인은 펀딩 구조 그 자체에 있으며, 이 구조가 특정한 유형의 창업자를 길러낸다. 한국 시장을 평가하는 유럽과 미국 자본에게는 바로 그 유형을 알아보는 일이 중요하다.
전략적 기질
서울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일했던 한 독일인 동료에게는 한국인 동료들을 향한 한 가지 의문이 늘 따라다녔다. 몇 분 늦은 사람이 왜 그렇게까지 지나치게 사과하는가. 독일인은 시간을 엄수하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한국인의 시간 감각은 단순한 정밀함 이상이었다.
이런 관찰은 데이터로도 뒷받침된다. 호프스테더의 불확실성 회피 지수에서 한국은 85점을 받는다. 이 지수의 틀 자체는 지난 20여 년간 비교문화론 학계의 비판을 받아왔지만, 1차 비교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 46점, 독일 65점, 일본 92점과 비교하면 한국은 상위권에 속한다. 시간 엄수로 이름난 독일조차 한국보다 20점 낮다.
가톨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이창봉 교수는 펜실베이니아대에서 화용론을 공부한 언어학자이자, 한국 사회의 패턴을 글로 풀어온 연구자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여러 현상을 이 하나의 성향으로 설명한다. 위계를 빠르게 정리하려는 본능, 새로운 모임에서 누가 누구인지 신속하게 파악하는 감각, 남들과 같아지려는 충동이 모두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같은 성향이 다르게 드러난 것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같은 성향이 ‘빨리빨리’를 낳았다고도 설명한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서구의 보건 시스템이 위원회를 소집하던 사이 한국이 드라이브-스루 진단소를 설계하고 진단키트를 양산하며 추적 인프라를 세웠던 것도 바로 그 순발력 덕분이었다.
불확실성 회피는 전략적 기질이다. 한국 제조업을 정밀함으로 이름나게 만든 대기업 생산 라인을 떠받친 것도 이 기질이고, K-방역을 낳은 것도 같은 본능이다. 한국 아이의 가방은 등 한가운데 가지런히 놓이는데, 미국 아이의 가방은 어깨끈이 비뚤어진 채 옆으로 매달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차이의 일부도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기질이 거꾸로 작용하는 영역이 하나 있다. 불확실성이 곧 그 일의 재료가 되는 영역, 바로 스타트업이다.
공공 펀딩 구조
지난 10년간 한국의 공공 스타트업 펀딩 체계는 아시아 최대 수준으로 커졌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예비창업패키지, 초기창업패키지, 도약패키지, TIPS, 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KSGC) 등을 운영하며, 연간 사업비만 조 단위에 이른다. 초기 단계 기업에 투입되는 공공 자본의 규모만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후원자 중 하나다.
결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소벤처기업부의 대표적 예비 단계 지원 사업으로 2019년 정식 시행된 예비창업패키지를 다룬 한국 언론 보도는, 지원 기업의 5년 차 생존율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특히 AI·바이오 등 지식서비스 분야의 생존율이 제조업보다 낮다고 짚는다. 2025년 수치는 한결 단단하다. 펀딩을 받은 스타트업 수는 3,136곳으로 9% 줄어든 반면, 기업당 평균 투자 규모는 24% 늘어 31억 2,000만 원에 달했다. 3분기 한 분기에만 단 세 건의 거래가 전체 투자의 16%를 차지했다. 리벨리언, 퓨리오사AI, 메디트 세 곳이다. 결국 구조적 원인은 펀딩 구조 그 자체에 있다.
정부 자금은 민간 VC라는 중간 단계를 거쳐 창업자에게 전달된다. 국가가 정한 엄격한 보고 요건을 따라야 하는 VC는, 그 부담을 그대로 창업자에게 넘긴다. 한국의 창업·투자 환경을 다룬 한 독립 분석은 이런 구조를 ‘비효율의 삼각형’이라 부른다. 정부가 정책을 정하고, VC가 컴플라이언스를 관리하며, 창업자가 사실상 자기 자금의 행정관이 되는 구조다. 같은 분석은 창업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창업자들이 제품을 다듬거나 고객과 대화하기보다 양식을 채우고 KPI를 증명하며 검토 서류를 준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2026년 초 스타트업 얼라이언스가 국내 AI 스타트업 101곳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AI 기본법에 대응할 준비를 시작한 곳은 단 2%에 그쳤고, 절반 가까운 기업이 이 법이 자사에 무엇을 요구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게 컴플라이언스 부담이 커질수록, 정작 초기 사업에 써야 할 시간과 노력은 줄어든다.
2025년 국정감사는 이런 구조가 낳은 비용을 정면으로 드러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10월 23일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기관을 감사하면서, 한국벤처투자(KVIC)가 운용하는 모태펀드의 자펀드 계약에 ‘독소조항’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공식 기록에 남겼다. IPO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스타트업이 연 20%에 이르는 위약금을 부담하도록 한 조항이다. KVIC 이대희 대표는 이 조항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모태펀드가 전체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에 불과해 시정 권한이 제한된다고 밝혔다. 같은 해 스타트업 종사자의 직무 만족도는 35%로, 관련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았다. 구조는 견고하게 유지되고, 그 대가는 결국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떠안게 된다.
행정관이 된 창업자
이 구조는 특정한 유형의 회사를 만든다. 한 대표적 사례를 따라가 보자. 정부 지원을 받아 베트남에 진출한 지 2년 차에 접어든 한 한국 창업자가 있다. 그는 정부 지원 보고서의 모든 마일스톤을 달성했고, 그 과정에서 지원 기업 가운데 우수상까지 받았다. 회사 등기에는 운영상 아무 역할이 없는 퇴임 대기업 임원이 한 명 올라 있다. 펀딩 기관에 잘 보이기 위한 자리다. 모든 행사와 미팅, 사소한 활동 하나까지 그가 직접 작성하는 관리 일지에 빠짐없이 기록된다. 사업 모델 자체에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정부가 원하는 그림에 맞춰, 그가 한국 안에서 보고 떠올린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만 통하는 포인트 적립 방식처럼, 겉으로는 한국의 문제를 푸는 듯 보였지만 해외로 확장될 여지는 없었다. 여기에 컴플라이언스 부담까지 더해지며 운영 자금은 빠르게 줄었고, 완전히 지친 뒤에야 그는 앞으로 2년이 더 지나도 궤도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 사례야말로 시스템이 의도한 그대로 만들어낸 결과다.
한국 시장을 평가하는 유럽이나 미국 투자자에게 이 구조는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베를린의 패밀리오피스나 런던의 VC 앞에 앉은 한국 창업자는, 대개 앞서 설명한 구조가 길러낸 사람이다. 그는 설득력 있는 KPI 자료를 만들 줄 알고, 감사를 무리 없이 통과할 형태로 자신의 실적을 정리해둔다. 다만 노련한 해외 투자자는 여기서 한 가지 능력을 더 들여다본다. 깊은 불확실성을 충분히 견디면서, 처음 계획에는 없던 제품-시장 적합성(PMF)을 스스로 찾아내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런 능력은 한국 창업자가 거쳐온 환경에서 좀처럼 길러지지 않는다.
해외 자본이 선택하는 것
링크드인 공동창업자 리드 호프먼은 해외 자본이 보상하는 본능을, 실리콘밸리의 격언이 된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제품의 첫 버전이 부끄럽지 않다면, 너무 늦게 출시한 것이다.” 이 말의 핵심은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관점이다. 가치는 출시와 피드백, 재조정을 반복하며 만들어지고, 그 속도는 꼼꼼한 문서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팀 쿡도 2019년 스탠퍼드 졸업 연설에서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다. “도전 속에서 용기를 찾고, 외로운 길 위에서 자신의 비전을 찾으라.” 두 창업 문화 모두 문서화보다 출시를 앞세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한국 시스템 안에서 성공한 창업자는, 단정한 실행과 분명한 마일스톤, 보고 양식을 충실히 따르는 태도, 부끄러운 첫 버전을 내놓지 않으려는 신중함으로 보상받아 왔다. 모두 유럽 벤처캐피털이 흔히 위험 회피로 읽는 행동들이다. 그를 우수상으로 이끈 바로 그 습관이, 해외 LP 앞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이라는 평가로 이어진다. 반대 방향의 오해도 흔하다. 유럽 기관 투자자는 한국 창업자의 이런 문서 중심 태도를 그저 흥미로운 문화 차이쯤으로 가볍게 넘기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펀딩 구조가 만든 결과다. 창업자는 자신을 키운 시스템이 가르친 방식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초기 단계 기업에 투자하는 자본은 사실상 한 가지를 더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다수의 창업자는 KPI 규율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다. 반면 그보다 적은 수의 창업자는, 그 문화에 적응하면서도 그 안에서 실험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알아보기가 더 어렵다. 그래도 단서는 있다. 이들의 이력에는 대개 공식 지원 기록에 남지 않는 시기가 들어 있다. 지원금 없이 버틴 기간이나 한 시장에서 철수한 경험처럼, 서류에는 드러나지 않는 시간이다.
해외 투자를 기대하는 한국 창업자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관점의 전환이다. 한국의 지원 기관은 불확실성을 충분히 줄였다는 확신을 원하지만, 실리콘밸리 투자자는 그 불확실성을 견디며 배울 수 있다는 증거를 원한다. 이제 한국 창업자는 그 둘을 모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지원 시스템은 더없이 성실한 행정가를 길러냈다. 다만 시장이 요구하는 것은 창업자다.
참고 자료:
호프스테더 인사이츠, 국가 비교 도구 — 한국·미국·독일·일본: hofstede-insights.com/country-comparison-tool
이창봉, “불확실성 회피성향으로 본 학폭 논란과 코로나 방역,” 오피니언뉴스, 2021년 3월 17일: opinionnews.co.kr
KoreaTechDesk, “High Entry, Low Survival: What Korea’s Pre-Startup Package Reveals About Early-Stage Risk” — 예비창업패키지 생존율 추이 보도: koreatechdesk.com
중소벤처기업부, 2025년 3분기 벤처투자 데이터 (KoreaTechDesk, “2025 in Review” 보도): koreatechdesk.com
이글러 랩(Eagler Lab), “Beyond the Pitch Deck: What Founders Really Face in Korea,” 2025년 4월 11일 — 모태펀드 구조와 창업자 컴플라이언스 부담 분석: eagler.blog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AI 기본법 컴플라이언스 조사(101개 AI 스타트업) (KoreaTechDesk, “The New Compliance Divide” 보도): koreatechdesk.com
스타트업 얼라이언스·오픈서베이, 스타트업 트렌드 리포트 2025 — 종사자 직무 만족도 (Platum·KoreaTechDesk 보도): koreatechdesk.com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2025년 국정감사 10월 23일 — 한국벤처투자(KVIC) 이대희 대표 모태펀드 자펀드 ‘독소조항’ 증언 (KoreaTechDesk, “National Audit 2025” 보도): koreatechdesk.com
리드 호프먼, “If There Aren’t Any Typos In This Essay, We Launched Too Late,” 링크드인: linkedin.com/pulse
팀 쿡,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 2019년 6월 16일, Stanford Report: news.stanford.edu
Saint Clair 유럽–한국 회랑 자문 경험, 2016–2026.
고지: 이 글은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투자 자문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의사결정은 독립적인 조사와 자격을 갖춘 자문가의 상담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Saint Clair 소개: Saint Clair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크로스보더 자본 인프라를 설계하고 구축한다. 접근이 희소한 곳에 접근을 제안하고, 구조가 부재한 곳에 구조를 만들어낸다. 2016년 설립.
